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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5-11-08 16:13:09 | 조회 : 6995
제      목  책 앞에 부끄럽다
책 앞에 부끄럽다



'느낌표'라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아실 것이다. 그 중에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있는데, 발상이 꽤나 신선해서 즐겨 보곤 했다. 방송의 위력은 굉장했다. 사회를 보는 두 개그맨의 손은 미다스 왕의 손이라 만지는 책들은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행복한’ 작가들 명단에 아는 이들의 이름이 늘어갔고, 동업의 처지에서 약간 배가 아프기도 했다. 비판도 없지 않았다. 그 책들만 빼고는 오히려 판매량이 줄어들었다는 출판사들의 볼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렇지만 나는 황금시간대에 책을 화제로 삼았다는 점만으로도 옹호하는 편이었다. 얼마 전에는 내가 몸담았던 출판사에서 펴낸, 존경하는 선배 작가의 소설이 선정되는 경사까지 생겼으니….

도서선정을 거부한 사람들

그 바로 직후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이 당신의 출판사 책이 선정되자 정중히 거부 의사를 표했다는 것. 담당 PD에게는, 지은이가 허락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위로하면서. PD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지은이 권정생 선생의 반응 역시 정중한 사의였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가십처럼 쉽게 묻혀버렸지만, 내 가슴에 남은 충격은 컸다. 두분이 내건 이유인즉, 독자들로부터 ‘책 고르는 재미’를 빼앗아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 머리가 어찔했다.

내 요즘 사는 꼬락서니를 절로 뒤돌아보게 되었다. 글 한줄을 쓰더라도 컴퓨터 앞에 앉지 않으면 불안하다. 원고지는 한 십년 써본 적이 없다. 글을 쓰다가 찾아야 할 게 있으면 인터넷 검색 창을 띄워 가볍게 해결한다. 두꺼운 사전을 펼칠 이유가 없다. 서점에도 잘 가지 않는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인터넷 서점을 이용, 딸깍하면 그만이다. 한 사흘쯤 있으면 딩동 벨이 울린다. 나는 영수증에 서명하고 선물처럼 책꾸러미를 받아든다.

이러고도 작가다!

새삼 얼굴이 달아오른다.

“책은 늘 책 이상이다.” 누가 한 말인가? 책은 눈앞에 보이는 고형 물질, 또는 그 속에 담겨 있는

정보의 양만이 다가 아니다. 어린 시절 누나의 책꽂이에서 본 빨간색 표지 <소월시집>은 그 속에서 슬핏 떨어지던 빛바랜 은행잎만큼이나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가한 휴일 오후, 어쩌다 옛날 소설책을 꺼내 표지를 들추자 나타나는, 법무부 관인이 찍힌 ‘도서열독허가증’은 내 젊은 날의 방황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때로는 좌절된, 그러나 아름다운 욕망

술자리에서 모처럼 김지하의 <황토>가 화제에 오르면, 지금은 지방대학에서 조용히 늙어갈 벗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적조했구나, 벗이여. 그럴 때 책은 두루 추억이다. 세배를 간 노시인의 집에서 만난 서가는 그것 자체로 한국문학의 위엄이다. 시골 우체국에서 네루다를 끼고 온 중년 여인을 보았을 때, 히말라야 산 속 롯지에서 마르케스를 읽는 서양 여자를 보았을 때, 나는 다가가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때 책은 좌절된, 그렇지만 아름다운 욕망이다.

고백한다. “책은 늘 책 이상”이라고 폼나게 말한 바 있는 나는 에서 연락이 오면 아마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흥분할 것이다. 그 한 일년쯤 뒤 달라졌을 내 모습이 보인다. 글, 그런 거 왜 쓰지? 책, 그런 거 왜 보지?

두루두루 부끄럽다. 김종철, 권정생 선생에게 부끄럽고, “책만은 책이 아니라 ‘冊’으로 쓰고 싶다”고 한 선배 작가(이태준)에게도 면목이 없다.

부기: 한겨레의 한글 전용 원칙을 99%(책) 지지하면서도, 1%(冊)의 여유는 좀 남겨 달라고 부탁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1%의 상형조차 금세기 안으로는 달라질 것만 같아 두렵다.



[한겨레21 2003-07-1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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