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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5-11-08 16:26:06 | 조회 : 6675
제      목  진짜 원조 왕솥뚜껑 생삼겹살집

진짜 원조 왕솥뚜껑 생삼겹살집



내가 몸 담고 있는 문학단체는 해마다 고교생 백일장을 연다. 처음에는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행사를 치렀다. 학생들은 쨍쨍한 가을 햇살을 피해 울긋불긋 단풍이 물든 나무 그늘 아래서 정성껏 원고지를 메워 나갔다. 그리고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10∼20명씩 조를 짜서 작가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문학 소년·소녀들의 눈망울은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상을 타지 못해 풀이 죽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좋은 경험이 아니었을까. 선생님들은 떨어진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떡볶이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번째 백일장은 이렇듯 두루두루 행복한 추억으로 마무리되었다.

백일장 같은 책의 운명

이듬해부턴가는 늦봄이나 초여름에 행사를 치러야 했다. 입시(수시모집)에 백일장 성적이 반영되는 점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립문공원에서 백일장을 여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주최쪽은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교 강당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표절과 부정행위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주최쪽의 취지나 소망과 달리 학생들은 백일장을 또 하나의 입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해서 모범답안을 전해 들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미리 외어온 남의 작품을 태연히 베껴서 내기도 했다. 꿈 많은 문학 소년·소녀들의 잔치판이어야 할 백일장은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일장의 미래가 자못 불안한데, 그게 꼭 책의 운명 같다는 느낌이 든다.

출판사에 다니는 후배 시인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엔 단편소설 모음집 표지에 누구누구 ‘소설집’ 대신 누구누구 ‘소설’이라 쓴다고 했다. 단편집이 장편소설에 비해 잘 팔리지 않기 때문에 한 출판사에서 그런 ‘묘수’를 창안해냈다는 것이다. 언뜻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출판계의 생존전략은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겨웠다.

이제 원고지 천매가 넘는 소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300쪽이 넘어가면 독자들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판형도 신국판만 고집하지 않는다. 가로를 자르든 세로를 키우든 눈에 띄어야 한다. 본문도 단색만 쓰는 시대는 지나갔다. ‘점잖은’ 소설책에서도 2도, 3도 색깔을 사용한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책 볼 시간에 어학연수를 떠나라!

그게 뭐 어때서? 하긴, ‘평양 랭면집’이니 ‘함흥 단고기집’ 하면 어째 좀 심심하지 않은가. 당장 길거리 간판을 보라. 우리는 다행히 ‘진짜 원조 왕솥뚜껑 생삼겹살집’이다. 삼겹살도 아니고 ‘생’ 삼겹살이고, 그 위에 ‘솥뚜껑’을 얹었는데 그것도 ‘왕’ 솥뚜껑이다. 게다가 ‘진짜 원조’! 이 정도면 몸에 영양이 흘러넘치는 이라도 들르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대학에 다니던 조카 여자애의 방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그때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 다 합해 20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반은 전공서적이요, 나머지 반은 만화책과 당시 유행하던 베스트셀러 서너권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래도 그 애가 올해 졸업하자마자 일류기업에 들어갔다. 내가 비법이라면 비법을 아는데, 책 볼 시간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라. 장담한다.

부기: 조카애가 이 글을 볼 확률은 거의 없다. 그래도 어쩌다 보게 된다면 미안한 마음에 나는 조카애를 데리고 ‘진짜 원조 왕솥뚜껑 생삼겹살집’을 찾을지 모른다.


[한겨레21, 2003년 7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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