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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7-06-25 20:20:08 | 조회 : 9424
제      목  지금도 먹먹한 함성, 열사의 부활 봤다

[6월혁명 20년, 민주화 20년] “지금도 먹먹한 함성, 열사의 부활 봤다”


과거 분수대와 차도에서 잔디광장으로 변한 서울시청 앞을 찾은 소설가 김남일씨

1987년 6월. 문인들도 책상을 물리고 거리에 서거나 더러 감옥에 있었다. 시와 소설을 쓰는 대신 대자보를 쓰고 구호를 외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으로 행진했다. 6월 항쟁이 가져다준 미완의 승리는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으며 그로부터 현재의 그들은 어떤 의미를 끌어내고 있을까. 서울·부산·광주에서 6월 항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3명의 문인들이 그때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 시위현장을 찾아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나눴다. 87년 당시 갓 등단한 신인소설가였던 김남일씨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실무자로 일했으며 6·10 경험을 담은 소설 ‘명동부루스’(소설집 ‘천하무적’ 수록)를 발표했다. 감옥에서 6월을 맞았던 김하기씨는 출옥후 ‘6월항쟁일지’를 엮었고 방북사건으로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5·18기념재단에 근무하면서 민주화운동 정신의 확산을 위해 노력해온 조진태 시인은 99년 시집 ‘다시 새벽길’을 발표했다. 편집자

1953년 스탈린 사후 동독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난다. 동독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소련군 2만5000명, 그리고 탱크 300대를 동원해서야 겨우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극작가 브레히트는 자신의 시 ‘해결방법’에서 소위 노동자의 나라에서 자행된 그런 무식한 해결방법 대신 꽤 신사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하여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

1987년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은 차라리 정권의 신임을 잃어버린 국민을 해산하고 다른 국민을 선출하는 게 나았으리라. 예를 들어 그해 1월 그의 57세 생일날, 노구를 이끌고 친히 나와 ‘청사’에 길이 남을 송시를 읊은 미당 서정주와 같은 국민!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이 시가 나오기 불과 나흘 전,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무자비한 고문 끝에 목숨을 잃는다. 그러고도 정권은 계속 악수를 둔다. 고문치사 사실을 은폐하려다가 “물가를 잡고 흑자원년을 만든” 공로조차 까먹고 만다. 나아가 전두환은 대다수 국민의 여망을 무시한 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가장 낮은 수준의 민주적 요구마저 원천봉쇄해 버린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에 길게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짧게는 1980년 5월 광주 이후 지겹도록 오래 지속된 ‘야만의 구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바야흐로 어떤 절정을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해야 한다.

뿌연 최루가스 속에서 마스크를 한 청년이 머리를 떨군 제 동료를 부축하는 사진. 그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로 역사였다. 6월9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은 그 청년은 연세대생 이한열군이었다. 그는 비록 병상에 누워 생사를 오가고 있는 몸이었으되, 수천 수만 장 사진으로 복제되어 6월의 거리로 흩어진다. 6월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여명(경찰 발표는 고작 1만8500명!)이 참여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그날, 전두환은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육사 11기 동기생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그러나 대회가 열린 잠실체육관은 이미 철저히 고립된 ‘그들만의 섬’이었다. 그날 밤, 명동성당은 훗날 ‘6월항쟁’으로 명명될 거대한 싸움의 첫 봉화를 밝히는 성지가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아직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햇병아리 작가였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거의 매일 길거리로 나가는 게 일과였다. 고백하건대 짱돌은 그렇게 많이 던지지 않았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솔직히 겁이 좀 났다. 유신(維新) 말기에 감옥 구경을 한번 한 적이 있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곧 아빠가 될 몸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만큼은 최루탄, 사과탄, (지)(랄)탄이 없는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헌신적으로 최루탄, 사과탄, (지)(랄)을 뒤집어썼다.

아, 징그러워라! 우리나라의 그 CSI SY-44 삼양-84 직격최루탄을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려고 했다가 ‘인마살상’의 위력을 확인하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던가. 밤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고역이었다. 그놈의 최루탄 가스는 삼겹살 냄새보다 지독해서 아무리 털어내도 전철을 타고 집까지 함께 갔다. 우리 국민들은 참 인내심이 많아서 연방 콜록콜록대면서도 나같은 사람들을 전철 밖으로 내쫓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곧 엄마의 자궁 밖으로 머리를 내밀 ‘미래’였다. 돌림자가 올 래(來)자였기 때문에 딸이면 미래라고 부를 작정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도무지 그런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탓이었다. 박정희가 18년을 따라다니며 악착같이 내 미래를 훼방놓더니, 이제는 전두환이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으니!

6월29일, 우리는 마침내 항복선언을 받아냈다. 민정당 총재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국민 앞에 약속했다. 그로부터 꼭 20년, 나는 말끔하게 잔디로 덮인 서울시청 앞 광장에 다시 나갔다. 한쪽에는 ‘반핵반김’ 궐기대회를 위한 무대가, 다른 한 구석에는 ‘일상의 여유’라고 적힌 작은 콘서트 무대가 있었다. 1987년 7월9일 이한열군 장례식이 열렸던 바로 그 자리. 그때 문익환 목사가 감동적인 연설을 해서 백만 인파를 울렸다. 내용은 단순했다. 그는 오직 죽은 이들의 이름을 떠오르는 대로 불러나갈 뿐이었다.

“이한열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이재호 열사여! 박영진 열사여….”

그뿐이었다. 그는 스물여섯명의 이름을 불렀고,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잠시 우리를 바라본 뒤 단상을 내려갔다. 달리 무엇을 더 말하랴! 그가 연설을 더 했다면 사람들은 더 많은 열사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결국 6월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죽음’을 당한 그 숱한 ‘죽음’들의 부활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문득 문목사의 목소리 톤으로 열사들 이외에 한국현대사에서 사라져간 많은 것들을 새삼 불러보고 싶다. 그 속에는 “성장, 발전, 성공, 물질, 속도, 정복, 물량, 물신, 경쟁, 지배, 제압, 다수, 남성”과 같은 가치 아래 짓밟힌 “틈, 사이, 여유, 차이, 공존, 배려, 기억, 흔적, 영혼, 소수, 여성”과 같은 가치들이 당연히 포함되리라.

참, 그때 태어난 건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고, 따라서 ‘미래’라는 이름은 취소되었다. 그래도 나는 사학과에 다니는 아들의 ‘미래’에 기대를 건다. 그 애가 엄마 뱃속에서 목격한 역사를 올바르게 이어주리라고.

[경향신문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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