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화네트워크

 |  |  |  | 

  칼럼
  · 김지숙
  · 김남일
  · 방현석
  · 오수연
  · 최수전

내 / 용 / 보 / 기
글작성자
 관리자 2008-08-06 11:57:59 | 조회 : 4310
제      목  밀폐된 창문과 웹 2.0 민주주의
밀폐된 창문과 웹 2.0 민주주의

살다보니 별 부지런을 다 떨어본다. 오늘은 새벽바람에 일어나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출판도시에 갔다. 조찬회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오랜 생활 리듬을 깨는 일이어서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지 말까. 그래도 가야지. 일찍 일어나려고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 않던 일을 하기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 사는 깜냥으로 사는 모양이다.

잠을 설친 김에 새벽녘에 집을 나섰다. 덕분에 제일 먼저 출판도시에 도착했다. 서해가 인접한 한강 하류에 자리잡은 출판도시의 이른 아침은 상쾌했다. 며칠간의 스트레스를 말끔하게 씻어주고도 남을 만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서해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서풍에 도시의 갈대가 넘실거렸다. 120여 개의 개성 있는 출판사 건물도 명물이지만, 이 도시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 수로다. 인공적인 조경 대신 옛 들판을 이어주던 수로의 보존을 선택한 도시설계자들의 아름다운 철학이 수로를 따라 흐르고 있다.

더욱 놀란 것은 회의가 시작된 다음이었다. 조금은 피곤한 안건을 놓고 한 참석자가 심각한 얘기를 하던 중에 다른 참석자가 말을 끊었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저기 좀 보세요." 삼면이 창으로 된 회의장 밖을 흐르는 수로 주변은 갈대와 버드나무가 어울려 자연 그대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저기, 저기 말예요." 그 사람이 가리키는 갈대 숲 속을 제법 큰 고라니 한 마리가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 도시의 숲에 살고 있는 고라니가 세 마리는 넘는다고 했다. 대지의 원형을 지킨 도시 설계자들의 아름다운 철학에 대한 자연과 생명의 응답처럼 느껴져서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마음이 푸근해졌다.

그런데, 그런 푸근한 마음을 오그라들게 한 것은 냉방기였다. 냉방이 지나쳐서 외겹 반팔을 입은 나는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이른 아침의 강변도시, 창문만 열면 시원한 강바람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곳에서 창문을 꽁꽁 걸어 닫고 인공 바람을 마시고 있었다. 삼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지만 정작 열 수 있는 창문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회의장이 있는 건물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출판사 건물의 유리창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닫힌 창문을 보며 이 도시의 건설에 참여했던 건축가들의 대부분이 아마 유럽출신이거나, 유럽에서 공부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대지 위에 새겨진 물길은 마음 밝은 이라면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 불어오는 사계절의 바람은 이 땅에 뿌리박고 살며 저 갈대와 함께 흔들려본 자들만이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창문이 마주보고 있어서 양쪽 창문을 열어두면 여간한 더위에도 끄떡없다. 이번 여름에도 선풍기를 몇 번 돌렸을 뿐, 냉방기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면서도 창문을 꼭 닫고 냉방기를 돌리는 집이 대부분이다.

큰돈을 들여 베란다를 개조해서 거실을 넓히고 통유리를 끼운다. 열 수 있는 창문은 아주 작게 내고, 그 아래 에어컨을 매단다. 여름에는 긴소매 옷을 입고 겨울에는 반팔로 지내는 우리의 삶은 풍요로움의 반증이기보다는 정체성 상실의 방증이 아닐까.

모든 사회의 위기는 자기 철학과 정체성의 혼란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나라는 매우 빠른 속도로 봉건적인 가치관을 극복하고 서구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도화했다.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소양과 권리의식은 이미 서구의 그 어떤 나라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웹 2.0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우리 나라는 서구 사회도 아직 가지 못한 IT민주주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갈대가 흔들려도, 창문을 닫고 냉방기를 켠 실내에서는 갈대가 눕는 모습이 대수롭지 않다. 바람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지도자들도 지금 혹시 웹 2.0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통유리를 통해 관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닫힌 창문을 열어 두기만 해도 얼마든지 시원한 아침바람을 느낄 수 있는데도.

[국제신문2008.08.05]

번호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45  [시사풍향계-방현석] 가난하다고 사랑이 없겠나 관리자 10.08.09 4656
44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그게 전태일 정신 관리자 10.02.19 5484
43  다시 하노이에서 [4374] 관리자 09.11.26 16699
42  '승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관리자 09.07.10 3878
41  한 사람만이 울 수 있다 관리자 09.06.02 4435
40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 사무국 09.04.29 4605
39  칭기즈칸과 그의 어머니 관리자 09.04.02 3749
38  한 장부의 생애를 생각하며 관리자 09.04.02 3522
37  팔레스타인의 눈물 사무국 09.01.22 4714
36  퍼와 포,나짱과 나트랑 사무국 09.01.22 3963
35  관용의 정치, 증오의 정치 관리자 08.12.15 3675
34  너만의 꿈을 펼쳐라 관리자 08.12.15 3483
33  우리를 지탱하는 것들 [260] 사무국 08.12.03 7281
32  예술을 평가하는 잣대 관리자 08.11.05 4448
31  한중일 중심 아시아 교류 위험한 발상 주변부 봐야 [137] 관리자 08.10.17 5050
30  호찌민의 종교관 [165] 관리자 08.10.15 5490
29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 [137] 관리자 08.10.08 7705
28  두 작가의 기념공원 사무국 08.09.17 4736
27  쿨한 베이징의 스타들 사무국 08.08.14 4838
 밀폐된 창문과 웹 2.0 민주주의 관리자 08.08.06 4310
  1 [2][3] 
Copyright 1999-2017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