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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8-09-17 11:28:20 | 조회 : 4736
제      목  두 작가의 기념공원

두 작가의 기념공원  

필리핀을 방문하면 들리게 되는 공원이 있다. 리잘공원. 시내 중심가 어디에서나 걸어 갈 수 있어 산책코스로 맞춤하다. 대로를 사이에 두고 마닐라베이와 접한 공원에는 평범한 아름다움이 있다. 규모가 엄청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문화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가한 일상이 흐르는 공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 노을이 질 무렵 리잘공원에서 바라보는 마닐라 앞 바다의 운치는 특별하다.

그러나 리잘공원이 지닌 더 큰 매력은 일상적 공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상적 시간의 아름다움이다. 리잘 공원에 나와서 저녁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평범한 마닐라 시민들이다.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의 시간은 이 공원이 기념하고 있는 '리잘'로 인하여 다른 한 겹의 시간을 획득한다.

1961년 6월 19일 라구나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리잘은 스페인식민지배에 저항하다 35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그를 수감하고 처형했던 스페인의 요새에 리잘기념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리잘공원은 스페인과 미국의 오랜 식민지배를 당한 무력한 나라로 필리핀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주는 공간이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소설을 통해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신랄하게 고발하며 필리핀에서 스페인이 손을 뗄 것을 주장했던, 20세기 아시아의 지성으로 발언하고 당당하게 최후를 맞았던 한 인간의 흔적은 필리핀들의 자긍심을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로하스 거리에 있는 성벽도시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면 바닥을 따라 길게 찍혀있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만나게 된다. 산티아고 요새의 감옥에서 시작된 발자국의 끝은 사형장이다. 1896년 12월 30일 새벽, 감옥을 나와 사형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던 한 인간의 발자국에 찍힌 시간이 리잘공원에는 오늘도 흐르고 있다.

필리핀에 리잘공원이 있다면 중국에는 루쉰공원이 있다. 상하이의 외국어대학교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루쉰공원은 넓고 수려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름다운 새소리가 사철 끊이지 않는 이 공원은 매일 아침 시민들이 나와서 체조를 하고 댄스를 즐기는 일상의 공간이다. 저녁이면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공원에 흐르고 있는 루쉰의 시간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상하이 시민들이 루쉰과 함께 숨쉬고 있는 이 공원의 옛 이름은 홍커우공원이다. 바로 윤봉길의사가 거사를 감행했던 그 공원에 중국인들은 루쉰의 시간을 불어넣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개발제일주의에 밀려 설 곳을 찾지 못했던 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를 다시 편성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공원들이 생겨나고 있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공원을 찾고, 산책하는 외국인들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필리핀에서 돌아와 집 근처에 있는 공원을 찾았다. 어느 외국 못지않게 잘 관리된 공원을 걸으며 나는 리잘공원과 루쉰공원을 떠올렸다. 우리의 역사 속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인물과 자랑스러운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그 시간과 인물들이 지금 공원에서 일상을 즐기는 시민들과 만나 오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루쉰공원을 찾는 상하이 시민들의 일상이 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루쉰공원에서 도시락폭탄을 던졌던 윤봉길의사는 누구의 일상과 함께 숨 쉬고 있을까.

[국민일보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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