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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08-08-06 11:56:52 | 조회 : 6098
제      목  미래를 이기는 과거는 없다

미래를 이기는 과거는 없다

우리나라 바둑은 세계최강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최강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최강이 될 수 있었을까. 이창호의 출현을 빼놓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80년대 후반, 이창호는 열세 살의 나이로 국내 타이틀을 차지했다. 신화처럼 등장한 그는 승승장구하며 세계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한국바둑의 수준은 이창호를 기준점으로 상향조정되었다.

한국바둑에서 기준의 상향조정은 단순히 바둑기사들의 실력향상을 의미하지 않았다. 행마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바둑인 전체의 수준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 비록 9급의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시선은 이미 이창호에게 가 닿아 있다. 시선이 이 높이에 모자라는 사람은 한국 바둑계에서 이제 발붙일 곳이 없다.

이것이 비단 바둑계만의 상황일까. 축구는 어떤가. 히딩크의 '속도'가 지나간 다음의 한국축구는 그 이전과 완전히 구별된다. 이제 한국의 축구선수들은 비록 졸전을 펼치더라도 그 시선의 높이는 히딩크에서 결코 낮아지지 않는다. 아직도 '정신력'이나 주문하는 낡은 해설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이가 계급이던 그라운드의 시대도 벌써 지나가버렸다.

박세리의 골프는 어떤가. 박태환의 수영은 어떠하며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는 또 어떤가. 아직 10대, 20대의 그들은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5대륙을 누비며 세계의 정상과 어깨를 겨루고 있다. 지금의 십대들은 이창호, 박세리의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박태환, 김연아와 더불어 성장한 세대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라를 뒤흔든 촛불을 처음 든 것도 바로 이 십대들이다.

대운하, 영어몰입교육, 0교시…… 현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줄줄이 내놓아도 무력감에 빠진 기성세대들은 가지도 못할 거면서 '이민 가야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어른들이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검역주권을 내주고 돌아와서 훌륭한 협상을 했다고 떠드는 '어이없고 개념 없는' 어른들이 '쪽 팔려서' 아이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뿔난 수천 명이 피켓을 들고 청계천에 모인 것이다.

아이들은 일본 바둑의 지존이던 임해봉을 만난 어린 이창호가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오십대의 임해봉이 부채를 소리 나게 접었다 폈다 하며 압박했지만 열여덟 살의 이창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압해버리지 않았던가. 호나우두와 맞붙었을 때 박지성이 어떻게 하며 아사다 마오를 대할 때 김연아가 어떻게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왜 우리의 대통령은 부시를 만나서 임해봉을 만난 이창호나 아사다 마오를 대할 때의 김연아처럼 하지 못했는가. 아이들이 묻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을 삼류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국 바둑의 눈높이를 이창호의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창호의 천재성 이전에 그를 수용할 줄 알았던 한국바둑계의 그릇 큰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 살 때부터 이창호를 가르쳤던 당시 한국바둑계의 지존 조훈현은 삼 년 만에 이창호에게 패해 타이틀을 내주었다. 만약 조훈현이 이창호를 키우지 않고 견제하려고만 들었다면 오늘의 한국바둑이 결코 세계지존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조훈현의 라이벌로 포스트 조훈현을 노리던 서봉수는 이창호를 폄하하기는커녕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이 신예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선배에 그 후배라고 이창호도 다르지 않았다. 비금도에서 올라온 이세돌에게 2연패하는 수모를 당한 다음 이창호가 한 한마디를 나는 잊지 못한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연패를 당한 이창호에게 "오늘 컨디션이 너무 나빴죠?"라고 기자들이 묻자 이창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오늘 제 컨디션은 최고였습니다." 이 태도가 바로 한국바둑이 세계최강인 이유다.

김연아가 경기 중에 실수를 하고 빙판에 넘어지는 것을 지금의 십대들은 모두 보았다. 그러나 즉시 일어나서 최선을 다해 남은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아낌없이 김연아에게 박수를 보냈을 뿐 그 실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획득한 3등을 1등보다 결코 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이들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결과를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말고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제 저녁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집전한 정의구현사제단이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다는데 나는 이것을 조금 바꾸어 말하고 싶다. 미래를 이기는 과거는 없다. 과거가 미래를 이기려드는 사회는 불행하다.

[국제신문2008.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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