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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8-01-03 11:11:53 | 조회 : 4714
제      목  은혜를 서둘러 갚으려 들지 마라
은혜를 서둘러 갚으려 들지 마라

새해 첫날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은 대학 사회의 오래된 전통이다. 한 해 동안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학문에 임하는 각오를 새로이 다지는 아름다운 풍습이다.

나도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선생님들의 집에 새해 인사를 다녔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사면 벽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몇 겹으로 책이 쌓여있던 선생님들의 서재 풍경은 수업시간에는 배울 수 없었던 강렬한 자극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신년하례'는 학생들이 선생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방적인 행사가 아니라 선생이 새해 첫날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학생들을 격려하는, '오픈 하우스' 봉사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신년하례는 어렵기만 하던 스승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어렵던 시절, 가난한 제자들의 입과 배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던 떡국과 만두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강단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된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정초가 되면 집을 비우곤 한다. '신년하례'를 피하기 위해서다. 내 스승들의 집에 배어 있던 깊고 그윽한 문학적 향취도, 학생들을 대접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할 자신도 없는 탓이다. 물론, 선생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인사를 받는다는 것이 민망하고 낯 뜨거워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신년하례'를 기어코 피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학생들이 현직에 있는 전임 교수들에게만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은퇴한 선생님을 먼저 찾아뵙는 것이 순서였고, 강사로 출강하는 분이라고 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다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졸업을 하면 전임 교수들의 집에도 인사를 잘 가지 않는다. 이제,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난 학생들이 은퇴한 노스승의 집에서 나란히 절을 올리는 훈훈한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며칠 전 졸업을 앞둔 졸업생들이 마련한 사은회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관계는 형식적인 관계가 끝난 뒤에 시작된다. 이제 교수와 학생으로 만난 우리의 형식적인 관계는 끝이 난다. 형식적 관계가 끝난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마주보고 있을 때 보았던 앞모습보다 돌아선 다음 그 뒷모습이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수십 명의 재학생들이 현직에 있는 선생들에게 인사를 다니는 풍경보다 단 한 명이라도 졸업한 지 오래된 제자가 스승을 찾아뵙는 아름다운 풍경이 많아지기 바란다. 그래서 학생들이 새해 인사를 오겠다고 우기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새해 인사를 하고 싶으면 졸업하고 3년 이상 지난 뒤에 와라. 그 대신 지금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러 가라. 그들 중에 단 한 명도 고맙고 존경스러운 스승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내게는 몇 명의 베트남 친구들이 있다. 사적으로는 물론이고 공적인 일로도 신세를 지곤 한다. 어쩌다 베트남에 가면 바쁜 일을 제쳐두고 나를 도와주기 예사다. 호치민 평전을 쓰기 위해 취재할 때는 특히 그랬다. 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호치민과 함께 일했던 북베트남 측 인사들은 물론 미국의 편에 섰던 남베트남 측 요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미안해하며 작은 선물을 주려고 했을 때 한 베트남 친구가 농담처럼 하던 말이 떠오른다. "베트남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 '은혜를 너무 서둘러 갚으려 들지 마라'."

시대가 경박하고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시대다. 실시간으로 접속되지 않으면 즉시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접속 대상을 찾는 것이 이른바 디지털시대의 특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디지털화된다고 해도 삶은,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 누구도 누구와 대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오래 잊고 지낸다.

지금 우리가 어떤 형식적인 관계이고, 그래서 찾아가고 인사드린다면, 그리고 그 형식적인 관계가 종료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관계라면, 그것은 사람의 관계라고 할 수 없다.

모두들 지난 한 해 신세를 지고 은혜를 입은 분들이 참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도 도움 받아야 할 분들 또한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좀 미뤄두고,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을 너무 오래 잊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은혜를 너무 서둘러 갚으려 들지 않는 한편으로 은혜를 너무 오래 잊고 지내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 중앙대 교수·소설가

[국제신문2007.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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