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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08-03-19 10:28:07 | 조회 : 4381
제      목  찬드라 꾸마리 구릉과 쩐 타인 란
찬드라 꾸마리 구릉과 쩐 타인 란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찬드라 꾸마리 구릉. 1992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던 그녀는 라면 한 그릇 값을 지불하지 못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시켜먹고 나서야 미싱공으로 일하던 공장에 지갑을 두고 온 사실을 알고 주인에게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국말이 너무나 서툴렀던 그녀는 경찰에 넘겨졌고, 경찰은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넘겼다. 경찰이 정신병자의 주문으로 취급한 '이상한 소리'는 다름아닌 네팔어, 찬드라 꾸마리 구릉의 모국어였다. 그녀는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공장에 가서 지갑을 가지고 오겠어요. 제발 절 놓아주세요' 하고 울면서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신병원에서 그녀는 한국여자 선미가 되었다. 정신병원에서 만난 한 여자가 그녀를 '선미야'하고 불렀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지 무려 6년 4개월 만에야 풀려난 그녀는 포카라에 있는 아름다운 고향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모국어가 정신병자의 괴성으로 취급당했던 6년4개월의 시간이 그녀에게 입힌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유되기 어려운 깊은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간 고향집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어머니도 없었다. 소식이 끊긴 딸을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다.

찬드라 꾸마리 구릉은 그래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 안 마이, 열아홉의 나이로 지난해 한국에 시집왔던 그녀는 다시는 살아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그녀가 죽기 전날 베트남어로 쓴 편지는 우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고, 건강은 어떤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당신이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길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녀는 결코 팔자를 고치려고 한국에 온 여성이 아니었다. 열아홉 처녀가 가져도 좋을 꿈을 가졌던 그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저는 당신이 맘에 들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았을 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일 뿐이었죠. 하지만 베트남에 돌아가더라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길 바라요.' 그러나 이 편지를 쓴 다음날 그녀는 이 편지를 읽어야 할 남편에게 맞아죽었다.

그리고 쩐 타인 란. 스물두 살의 그녀는 올 해 초 결혼을 했다. 자신을 키우느라 평생을 고생한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편안한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녀는 머나먼 한국으로 시집왔다. 그러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가족들로부터 그녀는 존중받지 못했다.

그녀는 한국에 온 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베트남어로 쓴 일기는 짧지만 고통스러웠던 한국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엄마와 가족, 친구들이 있는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다…나는 베트남에 돌아갈 때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 이혼하고 돌아가면 그만인데 그들이 왜 그럴까.' 이 일기를 쓴 일 주일 뒤인 지난 6일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가 탓해야 할 것이 찬드라 꾸마리 구릉을 경찰에 넘긴 식당주인과, 다시 그녀를 정신병원에 넘긴 경찰과, 또 그녀를 6년 넘게 가두어 둔 정신병원 직원들뿐일까. 자신의 열아홉 살 아내를 죽인 후 안 마이의 남편과 가난한 나라에서 왔지만 인간적 자존심을 잃지 않았던 신부를 따뜻하게 식구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쩐 타인 란의 시댁사람들만을 탓할 수 있을까.

다른 것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와 철학이 없는 사회가 이런 불행을 양산한다. 우리 사회가 영어에 기울이는 관심의 100분의 1만 경제력이 약한 나라에서 온 이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말 한 마디라도 이해하고 배우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뉴베리파크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850명은 이달 초부터 네팔어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고 한다. 한 달 단위로 세계의 41개 언어를 배우게 하는 이 교육방침에 어떤 철학이 놓여 있는지를 '영어몰입'교육을 주창하는 이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교육적인가. 아니라면, 어느 쪽이 더 선진적이고 실용적인가.

[국제신문20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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