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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6-04-14 12:03:22 | 조회 : 8153
제      목  꿈은 스포츠로 이뤄지지 않는다

꿈은 스포츠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맛도 몰랐다. 같은 밥상에 둘러앉은 일행도,다른 밥상의 손님들도 그런 듯했다. 텔레비전을 등지고 앉은 손님들은 분명히 자리를 잘못 잡았는데,고개를 꼬고 몸을 트는 어려운 자세로 버텨냈다. "에구!" 어디선가 탄성이 터지면 모든 얼굴이 반짝 들렸다. 텔레비전 속만 움직이고 식당 안은 일시 정지되었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교회에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이 지긋한 여신도들이 모여 앉은 온돌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어,무릎이 상대적으로 덜 아픈 한 분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말로 방송을 중계해주었다. "여러분,우리 기도합시다." 그분은 새로운,그러나 별로 기쁘지 않은 소식과 함께 제안했다. 그러나 바깥에서 "와아!" 같기도 하고 "앗!" 같기도 한 함성 소리가 나자,잘 안 꺾이는 무릎을 제 손으로 내리누르면서 다시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때 우리 언니는 전화를 받았다. "미안해요,이럴 때 전화해서." 상대방은 침통하게 사과부터 했다. "아이,천만에요." 언니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놓고는 텔레비전에 바짝 다가앉은 형부한테 눈치가 보여 무선 전화기를 들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 안 되거든요. 이상하게 내가 시합을 보면 우리 편이 꼭 지더라고요." 놀랍게도 상대방은 천기를 누설했다. 언니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이상하게 언니가 시합을 봐야 우리 편이 꼭 이기더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광고가 나왔다. 사람 많이 지나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잘생긴 청년이 외쳤다. "우리는 다시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그런데 그 청년은 왜 목이 쉬었을까? 설마 4 년 동안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우리'는 누구였을까?

그때 누군가 찌개그릇에 숟가락을 담그며 푸념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데 야구를 저렇게 해도 되는 거야? 창피해서,원."

그때 우리의 야구를 지켜보는 '전 세계'는 어디 있는 누구였을까?

그때 나와 일행은 상의할 일이 있어 모였으나,별 진척 없이 헤어졌다. 중지를 모은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나는 내 언니하고도 정치적 견해가 다르며,심지어 어머니하고도 종교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새만금 매립에 찬성한 이들이나 사학법 개정에 반대한 이들과는 의견이 다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용례의 '남'은 아니지만,축구나 야구 덕분에 빈부격차,사상대립,이해갈등을 훌쩍 뛰어넘을 수는 없다.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짧으면 열광이요,길어지면 망상일 터이다.

스포츠는 스포츠다. 국제 경기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이기건 지건 나 개인의 삶과는 관계없고,거창하게 민족이나 국가의 나아갈 길과도 상관없다. 경기 때문에 흥분할지언정 국가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다. 스포츠 경기를 계기로 폭발하는 애국심은 의심스러운 애국심이다. 그때 말고 그 애국심은 어디에 있나? 전 국민이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추상적으로 헌법에 명기된 자유와 평등,통일과 평화 등등일 텐데,우리가 정말로 그런 것들을 고민하나? 그런 가치들을 위해 당장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양보하겠는가? 물론 스포츠도 기여할 바가 있겠으나,꿈은 스포츠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지구 곳곳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3년 전 그날 밤,현지 시각으로 3월 20일 이른 새벽 이라크에 미군이 밀고 들어갔다. 우리는 자칫 입을 수도 있는 손해를 겁내고 구체적이지 않은 이득을 기대하며,이라크에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소위 연합군에 참가했던 다른 나라 군대가 거의 다 철수해도 우리 군대만은 배짱 좋게 끝끝내 남아 있다. 우리는 호전(전쟁을 좋아함)적인 나라다. 전 세계는 대한민국의 야구만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다. 보다 복잡하고 오래갈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대한민국!"이 내게는 공허하면서도 위험스럽게 들린다.

[부산일보 2006/03/27 0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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