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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6-06-22 12:33:31 | 조회 : 6776
제      목  미래에서 돌아온 어른들

미래에서 돌아온 어른들

  
선생님,안녕하세요? 저는 이십 오년도 전에 선생님께 배웠던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야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신 반에 소속된 적 없고, 어느 모로 보나 별 특색 없었으며,그저 선생님이 담당 과목을 가르치시는 열두 개 학급 칠 백 명도 넘는 학생들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니까요. 저는 물론 선생님을 기억하니까 이렇게 편지를 드리지요.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건강하시고,좋은 필체도 변함없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공짜로 전철을 타려다 된통 걸려 학교로 연락이 와서 정학을 맞을 뻔 했을 때 전철역까지 친히 찾아가 역장에게 제 대신 빌어주신 최윤희 선생님, 햄릿 흉내 내던 사춘기의 저를 철학에 눈 뜨게 해주신 차의식 선생님,지각한 벌로 겨울에 계단 청소하는 제 옆을 지나가시다가 제 언 손을 잡아주셨던 김영숙 선생님,저 때문에 속상해서 원래는 잘 못하시는 술을 엄청 드시고 우셨다던 김노수 선생님……제가 나이 들면 들수록 그 은혜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도는 고마우신 은사님들과 함께,저는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첫 시간 내내 선생님은 공책 가장자리에서 이 센티미터 띄어 제목,제목 아랫줄에 제목보다 일 센티미터 띄어 부제목,이런 식으로 필기법을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들어오셔서는 학생들과 인사 나누고 곧장 돌아서서 칠판에 유려한 필체로 필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칠판이 가득 차면 지우고 다시 채우셨습니다. 50분의 수업 시간 중 35분 동안 선생님은 칠판에 필기를 하셨고,10분 동안은 학생들이 필기를 마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45분 동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선생님이 칠판에 그려놓은 그림을 공책에 베끼면서 점을 찍느라고 볼펜 끝으로 톡톡 소리를 낸 아이를 혼내신 것뿐이었습니다.

"다른 애들은 소리 안 내는데 왜 너는 소리 내니?" 나머지 5분 동안 선생님은 천천히 몇 마디로 설명하셨고,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 나가셨습니다. 그 이후로 일년 동안 똑같이 그런 식으로 수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선생님의 완벽히 정서된 공책을 각반 반장들에게 돌려,아침 수업 전에 칠판에 필기해놓도록 시키셨습니다. 선생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주기적으로 아침에 한 시간씩 일찍 와서 반장이 칠판에 필기해놓은 것을 공책에 필기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시는 필기는 반장의 필기가 끝난 데서 이어지고, 반장의 아침 필기는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필기가 끝난 데서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완벽한 공책이 몇 권의 참고서를 베껴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챘지만,선생님께서 매달 공책 검사를 하셨기 때문에 필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권의 참고서를 고스란히 공책에 베껴야 했단 말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한테 그다지 인기가 없었으므로,저는 그 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제가 선생님을 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왜 나이 들수록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도리어 또렷해지는 걸까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바로 지금 그 필기 시간인 듯, 지치고 화가 나는 걸까요. 선생님께서는 이 어린 것들이 무얼 알랴 생각하셨겠지요. 네, 그때 저야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알 만한 건 웬만치 아는 중년이 되어서도 제가 아직도 선생님 수업 시간에 앉아 있을 줄은, 그때는 차마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아셨습니까? 칠판에 필기하시는 선생님의 뒤통수를, 이십 오년도 더 지난 미래로부터 되돌아온 한 제자가 혐오감에 떨며 노려보고 있는 줄을?

선생님,제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한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특히 조회 시간에 마이크를 쥔 교사가 뱃속에서 끌어올리는 듯한 발성으로 내지르는 구령 소리를 들으면, 저는 세상이 정신없이 바뀐다 해도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는 제 까마득한 기억에 아름다웠던 면과 함께 끔찍했던 면도, 오늘날까지 다분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병아리처럼 짹짹거리는 아이들은, 아이들이 아닙니다. 미래에서 돌아온 어른들입니다. 그들은 고마우신 은사님들께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른 느낌의 선생님들에게도 돌아옵니다. 은사님들만 기억에 남는 게 아닙니다. 저 돌아왔다는 말씀, 선생님께 꼭 한 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2006/05/17 0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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