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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7-06-25 20:31:54 | 조회 : 6393
제      목  중동이 아니다
중동이 아니다
-<시제일치> 영화를 보고

동쪽도 서쪽도 없다. 방향은 상대적이다. 근동, 중동, 극동 모두 자기가 세계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세계 지도에 색색의 핀을 잔뜩 꽂아 놓고 불온한 생각에 잠겨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 뒤통수가 먼저 떠오른다. 이미 그런 용어가 널리 퍼져 있으니 편의상 쓰자 해도, 현대적 어감 또한 지독하다. 중동, 극동이라는 말과 문화나 역사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애매한 지역 구분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자체적 시공간 개념하고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짝을 이루는 단어는 ‘문제’다. 그리고 이런 골치 아픈 인상은 어느 동서남북보다 중동의 경우가 가장 강하다. 중동, 세계의 화약고. 마치 거기만 싹 도려내면 세계가 안전해질 것처럼.    

무엇보다도 중동이란 말은 내가 비록 몇 달 동안이지만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받은 깊고도 넓고, 다채롭고도 풍요롭다는 느낌을 전혀 담아 내지 못한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허옇게 화약 가루만 뒤집어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거대한 문명권이란 이런 거구나 나는 실감했다. 나 또한 녹아들어 버릴 것 같았다. 혼자 있을 때면 수 천 년 전에 죽은 시인과 함께 차를 마신다는 아랍어 작가 앞에서는 기가 죽고 말았다. 내게는 거기가 기껏해야 2백 년 전 누군가의 헤픈 손가락질로 갑자기 생겨난 유럽의 문제투성이 동쪽 따위가 아니다.  다른 어마어마한 데다. 수메리아나 앗시리아라고 하면 너무 회고적일 테니, 나는 무난하게 아랍이라 하겠다. 아랍, 아시아와 아프리키와 유럽을 잇는 다리. 또는 세 문명이 흘러드는 대양.      

<시제 일치: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서 상영된 영화 중에 <내전>(모하메드 수에이드 감독)은 실종됐다 주검으로 발견된 한 레바논인 조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주변 인물들은 말한다. 그가 전쟁이 다시 터질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말수가 줄고 얼굴이 어두워졌다고. 한 치과 의사는 레바논인들이 충치를 앓는 비율이 굉장히 높은데 충치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라면서, 이 집단적 스트레스는 전쟁의 후유증인 것 같다고 나름대로 진단을 내린다. 내전 당시 폭격에 파괴된 건물에서 발견된 조감독의 주검은 오래 되어 처참했다고 한다. 구체적 사망 원인은 심장 마비, 그러나 그가 왜 그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하염없이 올라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주검을 수습해준 성직자는 보다 처참했던 사례를 기억해내는데, 내전 때 포탄이 아닌 어느 인간의 손으로 상반신이 없어져 버린 시체였다. 다른 말로 시작했다가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전쟁으로 수렴되고, 영화는 그 잊고 싶은 기억을 둘러싸고 빙빙 돈다. 주인공의 얼굴은 마지막에 희미한 사진으로 나온다. 수줍음을 잘 탈 것 같은 홀쭉한 사나이.

당연한 말이지만 아랍인들도 우리처럼 상처받기 쉽고 감정이 복잡한 개인들이다. 그들 각자도 고뇌하는 햄릿이다. 햄릿을 전쟁터에 갖다 놨다고 상상해보라. 구경하는 우리가 애가 타서 얼른 빼내 한적한 무대 위로 되돌려 놓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전쟁을 겪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런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다. 뉴스에 나오는 파괴된 거리, 먼지와 포연,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혀를 찰지언정, 그들의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원래 전쟁을 하도록 생겨먹었다. (나는 한 목사의 설교에서 이 말을 들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거기서 또 전쟁이나 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저 저 사람들이 또 저러나보다 한다.

왜 그럴까?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본 ‘주말의 명화’ 탓도 클 것이다. 아랍인은 나왔다 하면 무표정하게 죽는다.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이라고 버젓이 찍혀 있던 국정교과서 시절 세계사 교과서 탓도 있다. 명예살인이니 자살폭탄테러니,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자주 들리는 섬뜩한 말들의 영향도 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9. 11 테러 사건. 우리는 아랍에 대해 한껏 우호적으로 말해도 이럴 지경이 되었다.

“아니, 팔레스타인에도 작가가 있다고? 그 사람들이 공부해서 작가가 될 새가 있을까? 나는 그들이 투쟁하느라고 바쁜 줄 알았는데.”

그러나 나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자신의 물질화랄까. 정신이고 심리고, 주의고 주장이고 다 소용없고 현실의 논리는 엄연하더라는 교훈을, 우리는 어느 결에 톡톡히 얻은 것 같다. 현대 세계의 추세란 우리의 좋다거나 싫다는 감정, 하겠다거나 말겠다는 의지, 옳거나 그르다는 가치판단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사상 초유의 것임을 우리는 간파하고야 말았다. 우리의 의식은 이미 9.11 테러, 사담 후세인의 독재, 이라크 내전 따위를 초월해 버렸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 그 어느 것과 관계가 있나? 우리는 더 이상 오리엔탈리스트조차 아니다. 무감하다. 단지 거기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필요가 있었을 뿐. 북한 핵 문제(!), 석유 자원에 대한 우선권 확보, 이라크 재건 사업 참여 등. 아차 하는 새 영원히 우리를 버려두고 가버릴 저 빛과도 같은 자본의 질주를 죽자 사자 쫓아갔을 뿐. 우리는 거의 물리법칙과 합일된 득도의 경지다. 우리 자신의 마음 찌꺼기도 돌아볼 겨를 없고 그럴 이유조차 없는데, 남의 고뇌야 말해 무엇 하랴. 여기에도 햄릿은 없다.

같은 감독의 <황혼>은 1970년대 말에 파타 당 학생단원, 우리말로 치면 운동권 학생이었던 이들이 나이 들어 가끔 모여 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이야기이다. 누구누구는 내전 때 총 들고 싸우다 죽고 누구누구는 이민을 가버려 인원은 몇 명 안 된다. 그들은 토할 때까지 마시고 나세르의 눈동자가 파란색이냐 초록색이냐 같은 걸로 지겹게 말싸움 한다. 한 남자가 집에 가려고 윗도리 소매에 한쪽 팔을 꿴다. 그런데 다른 한쪽 소매가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없단 말이다. 그는 한쪽 어깨에 윗도리를 걸친 채 팽이처럼 돌다가 주저앉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아가 돼 버린 것 같아.”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무참히 살해됐을 때 우리는 경악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예정대로 파병 기한을 채웠으며 슬쩍 일 년 더 연장하기까지 했다. 내 생각에 비슷한 사건이 또 터진다 해도 우리는 경악하고 충격을 받겠지만, 예정대로 할 것 같다. 미국이 다른 나라 파병을 요청하면 또 갈 것 같다. 우리는 베트남전, 걸프전에도 베트남이나 이라크, 쿠웨이트라는 나라에 대한 좋다거나 싫다는 감정 일체 없이 갔다 왔다. 물론 미국에 대해서도 우리는 별 감정이 없다. 단지 약소국으로서 우리가 이 거친 세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객관적으로 필요한 일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제 3, 제 4의 김선일 씨 사건이 터져도 우리는 경악하고 충격을 받겠지만, 예정대로 할 것 같다.          

<대학살>(모니카 보르그만과 로크만 슬림)은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아니라 보기 드문 가해자들의 고백이다. 우리가 ‘레바논 내전’이라고만 알고 있는 전쟁은 실은 레바논에서 벌어진 국제전이었다. 1982년 9월 16일에서 18일 사흘 동안, 이스라엘에 가서 특별 훈련까지 받고 온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쳐들어가 천 명 또는 삼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죽였다. 학살자들은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학살을 지휘했던 장교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공기 청정기처럼 몸에서 청량한 공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학살의 순간이 끝나자마자 하늘도 땅도 보증하는 것 같던 그 이유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학살자들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토록 분명했던 학살의 이유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들은 가족들한테마저 과거를 봉인하고 20년도 넘게 침묵 속에 살아왔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을 때 미국인들의 지지율이 80퍼센트가 넘었다. 영국도 비슷했고, 우리나라도 논란이 일다가 ‘국익’ 때문에 전쟁 당사국인 미국, 영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군대를 파견했다. 보통 사람들 중에 전쟁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보통 사람 아닌 사람들 중에는 결코 적지 않다.) 싫어도 안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끈질기게 치른 셀 수 없는 전쟁 중에 끝나고 나서 이유가 기억나는 전쟁이 몇 개나 될까? 나는 지금이라도 대답해 줄 사람만 있다면 묻고 싶다. 우리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큰 일 나는 그 이유란 정말 무엇이었나? 그렇게 안 하면 약소국인 우리가 죽는 그 이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버려진 건물로 걸어 들어간 영화 조감독이 사로잡혔던, 전쟁이 다시 터질 거라는 ‘강박’은 사실 강박이 아니었다. 2000년에 그가 죽고 연달아 전쟁이 터졌으니까. 그러나 그 전쟁을 했던 사람들이 사로잡혔던, 전쟁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는 생각은 강박 아니었을까? 신의 계시처럼 우리 앞길을 부피도 질량도 남기지 않고 하얗게 태워버리는 인류 초유의 미래라는 것이, 나중에 알고 보면 케케묵은 인류의 강박 아닐까?

“봐! 저게 바로 악마의 얼굴이야.”

내가 이라크에서 머물 때 텔레비전에 부시 대통령이 나오자 옆에 있던 이라크인이 중얼거렸다. 나는 이라크인이나 팔레스타인에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세상은 나하고 굉장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도저히 이럴 수는 없고 이래서도 안 되는, 지옥하고 별 차이 없는 상태일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상황은 지옥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바그다드가 세계 215개 도시 중에 삶의 질이 3년 연속 최하위라고 신문(2006년 4월 10일)에 났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지난 1월 총선에서 하마스를 당선시킨 데 대한 보복으로 사실상 경제 봉쇄를 당했으니 머잖아 기아 사태가 날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일부 편견에 가득 찬 백인들에게는 아랍인들이 ‘기괴하게 소리치는 군중’으로 보인다면, 일부 학을 뗀 아랍인들에게는 장엄한 미국, 영국, 한국의 국회의사당이 악마의 제단으로, 이라크에 와있는 외국 군대가 소름 끼치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귀신들린 자들’로 보이지 않을까? 일부 백인들은 누구라도 날카롭게 따지고 들면 어깨를 으쓱하며 “편견이었어.”라고 말해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 아랍인들은 그러기도 힘들 것이다. 그들이 느낀 것은 혐오감 같은 머리를 흔들면 떨쳐버릴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 심장을 쥐어짜는 죽음의 공포이기 때문에.

<아슈라: 내 혈관에서 흐르는 이 피>(잘랄 투픽)를 보며 같이 울기. 목메기, 주르르 눈물 흘리기, 흐느끼기, 꺼이꺼이 통곡하기, 제 손으로 갈비뼈가 부서져라 가슴 치기, 스스로 채찍질하기. 간간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다.

“예언자는 통곡하는 사람이다.”

“다시 태어나면 상갓집에서 곡해주는 여자가 되고 싶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울어야 하고, 울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는 만화를 본 적 있다. 그 만화에서 ‘쿨피’(팔레스타인 남자 두건)를 두른 청년과 ‘야물커’(유대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또는 히잡 (아랍 여자 두건)을 쓴 아주머니와 유대 식으로 머리를 땋은 소녀가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시제일치> 상영관 안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마음이 놓였다. 거꾸로만 돌아가던 ‘주말의 명화’가 비로소 제대로 돌아갔다. 아랍인들이 가만히 좀 있지 않고 요동을 쳐서 전 세계를 위태롭게 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아랍으로 몰려가서 아랍인들을 위태롭게 했다. 그리고 명화들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아랍어 영화가 상영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4월 중순에 개봉된 <천국을 향하여>는 국내 상업 영화관에 오른 첫 번째 아랍어 영화일 것이다. 흔히 아랍 영화로 알고 있는 <욜>은 터키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은 이란어, <취한 말들의 시간> <거북이 날다>는 쿠르드어 영화다.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에 아랍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서너 편 나온 적은 있다. 내친 김에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는데, 2006년 4월 초 현재까지 아랍어에서 우리말로 작품이 한 권 이상 직역된 아랍어 작가는 다섯 명이 채 안 되는 것 같다. 나집 마흐푸즈 장편 2권, 갓산 카나파니 중단편집 1권 등. 여러 작가의 작품 모음집은 몇 권 있다. 갖가지 종류로 수십 권은 나온 <아라비안 나이트>는 리차드 F 버턴의 영어 번역을 편집한 것들이다. 우리나라는 기이할 정도로 아랍 문화 소개가 적다.)

<그녀+그 반 레오>(아크람 자타리)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법>(“) 같은 영화를 보고 나는 멋지게 당했다. 아무렴, 아랍도 사람 사는 데인데 누드 사진이 있고 동성애자도 있겠지,  그런데 나 놀라고 있니? 감독은 상대적으로 덜 자유로운 아랍의 분위기를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더 나는 놀라는 것이다. 아, 아직도 멀었다 멀었어! 하지만 이 영화들은 소재의 독특함을 넘어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나른하게 감상했다. 남자의 신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위를 말해보라. 눈? 입? 등?

아랍에 대한 남들의 선입견을 아랍 작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세계의 화약고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 여실히 보인다. 나는 그 노력을 상투성을 벗어나 보려는 형식적인 시도 이상으로 이해한다. 우리나라에도 왔다갔던 팔레스타인의 저명한 시인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짧은 에세이 <전쟁, 패배, 승리 그리고 문학> 중에서 몇 줄을 인용해 보겠다.

‘팔레스타인 시가 (이스라엘) 점령에 대해 부지런히 쓰던 시기가 있었다. 점령군은 어디나 있다. 그들은 초소는 어느 길에나 있다. 감옥은 가득 차고, 팔레스타인인 인구의 20 퍼센트는 감옥에 갇혔던 경험이 있다. 만사가 우리로 하여금 점령과 점령군의 탱크에 대해서 쓰지 않을 수 없게끔 떠민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탱크가 우리 시의 주제를 결정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매우 나쁘다. 우리는 우리 시에서 탱크를 걷어차 버리기로 결심했다. 이제부터 시는 탱크를 읊지 않을 것이다. 탱크가 우리 시마저 점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땅만이 아니라 시, 즉 정신마저 탱크에 점령당하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폭력이 나쁜 이유는 육체적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정신마저 폭력에 대응한 분노와 증오로 꽉 채워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랍 작가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만큼이나 자신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아랍인들의 정신을 ‘전쟁 전문형’으로 단정해버리는 우리의 선입견은, 우리에게는 견해일지 모르지만 본인들로서는 존재적 모독이요 정신적 폭력일 것이다. 아랍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는 이 정신적 폭력에 맞선 전략이다.

<신의 간섭>(엘리야 술래이만)을 만들기까지 감독은 생각 많이 했을 것 같다. 팔레스타인의 부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 할수록 고발하는 측이 깨지고 터진 누추한 모습으로, 고발당하는 측이 오히려 가공할 힘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부각되는 역설을 예민하게 고민한 듯하다. 마침내 고통을 보여주지 않고 고통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    

부당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부당한 어려움은, 다른 이들이 자기도 모르는 질문을 그들에게 해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당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면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체 하다가, 그러면 정당한 게 뭐냐고 묻는다. 너희들 처지에서는 억울하겠다마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너희가 힘 있고 돈 있다면 너희가 욕하는 저 나쁜 놈들처럼 안 하리라는 보장이 있나? 할 수 있는데 남의 땅이나 석유를 안 빼앗고, 걸리적대는 자들을 감옥에 처넣고 고문하고 죽여 버리지 않겠는가? 다 똑같고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무슨 해결책이 있겠어나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해놓고 그 다른 이들은, 자기는 당장 고통에 불타지 않기 때문에, 심오한 사념에 잠긴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여.  내가 보기에는 이 씁쓸한 인생관이 이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인 것 같다. 같은 말이 전문적, 시사적 또는 비의적 용어로 끝없이 변주된다. 부당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인간이 어떤 짓은 해야 하고 어떤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그런지, 기어이 진짜 도를 깨우쳐야만 한다. 말 그대로 자기가 해방되기 위해서 인류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것이 <시제일치> 영화들이 ‘주말의 명화’ 뒤집기를 넘어선 새로운 창작물로 승화된 비결이다. 이 영화들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기 중동의 문제들이 아니라 여기 나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이 글 첫 문장은 실은 자카리아 모하메드 시인의 말이다. “동쪽도 서쪽도 없다.”

[계간 볼 2006년 2호 수록, 원고출처-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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