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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5-11-08 16:00:14 | 조회 : 6520
제      목  소시민의 고민
소시민의 고민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목요일 오전에 재활용할 종이를 모은다. 그런데 장마철은 물론이고 장마철 지난 요새도 유독 목요일에 비가 자주 온다. 주룩주룩 비가 오는 목요일,버릴 종이로 머리를 가리고 아파트 현관을 뛰쳐나가 정해진 대로 주차장 한구석에 종이를 내던진다. 그리고 현관으로 뛰어 돌아와 머리카락에 맺힌 빗방울을 털어낸다. 주차장에 쌓인 종이는 금세 흠뻑 젖는다. 시에서 공지한 폐지 배출 요령에는 종이가 젖지 않도록 하라는 항목이 있다. 그러나 폐지가 젖지 않도록 비 오는 날에는 버리지 말라는 말은 없다. 폐지 수거 차량도 날씨와 관계없이 목요일에만 온다. 나는 실제로 시행되는 재활용품 수거 체제에 따랐다. 그렇다고 잘한 것 같지는 않다.

젖은 종이 쓰레기는 어떻게 될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으나,역시 종이 쓰레기가 젖으면 안 된다는 말 말고는 별 내용이 없다. 우리나라가 해마다 막대한 양의 폐지를 수입하고 있다는 말은 많다. 검색하다 나는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소시민인 내가 이런 것까지 걱정해야 되나? 왜? 다 대책이 있으시겠지. 하지만 너무 늦을 것 같다.

예전에는 아파트 각 집마다 다용도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모든 쓰레기를 와장창 떨어뜨렸다. 깨진 유리를 구멍에 밀어 넣고는 뒤늦게 오싹했던 경험이 나는 있다. 혹시 저 밑에 쓰레기를 거둬가는 아저씨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이제 돌아보면 무지막지한 방식이었으나,오랜 세월 합법적으로 그랬다. 산야가 쓰레기로 뒤덮인 뒤에야 분리수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대책은 늦다.

한때 '체제 부정'이 조선시대 역모죄에 버금가는 엄청난 죄목이었던 시절이 있다. 그 죄목으로 반대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던 이들이 생각하는 체제란,바로 자기들이었다. 자기들을 부정하면 체제 부정이었으니까. 짐이 곧 국가라던 절대군주와 별로 다르지도 않다. 독재자일수록 자기한테 모든 고민을 맡기고,국민들은 행복하게 각자 본분이나 잘하라고 윽박지른다. 엉뚱한 데 신경 쓰면 간첩이라고.

잘난 것 없는 우리는 우리 위에서 찰카닥 찰카닥 돌아가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위대한 작동 체제를 기대한다. 그런 것 있으면 얼마나 안심되고 편할까. 정녕 고민을 송두리째 맡기고 행복할까. 그러나 그런 위대한 작동이 이제껏 있었는지,또 앞으로는 과연 있을지 나는 의문이다. 인류가 봉착한 환경 파괴,자원 고갈,전쟁이 전쟁을 낳는 위기는 일부 범죄자들의 소행이 아니었다. 정확히 그 반대였다. 신이나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권들이 소신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해 애쓴 결과였다.

"엄숙하고 거만스러운 목소리인데 약간 발음을 잘못하는 것처럼 K에게는 느껴졌다. 정도에 지나치게 한층 더 엄숙성을 과장함으로써 발음의 과오를 살짝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카프카의 소설 '성'의 한 구절인데,성에서 걸려온 전화에 대한 묘사다. 성은 체제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한낱 부속품으로 틀어박힌 듯한 체제의 실상은 어쩌면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른다.

시키는 대로 했건만 거듭 환난이 닥치고,결국 책임은 소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요즘 나는 다시 쓰디쓴 환멸을 느낀다. 선거 때마다 입후보자들이 "믿고 맡겨 달라"고 외친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선거권자들은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린다. 믿지 말아야 할 후보를 깜빡 속아서 믿고 뽑은 게 잘못이 아니라,원래부터 믿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시민 감시나 시민 불복종,이런 것도 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이었다. 우리는 고민을 맡긴 적이 없고,맡길 수도 없다. 대통령,정치인,관료,전문가,자랑스러운 우리의 대표 기업 등등에게 문제 해결을 위임하는 행복을 포기하고,나는 주제넘게도 인상을 찌푸린 개인이 되기로 했다.

이번 목요일에도 비가 온다면,비가 오지 않는 목요일까지 집안에 폐지를 한두 주 묵힐까 한다. 내게 걸리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고민해 보는 수밖에 없다. 안 그랬다가는 또 후환이 닥칠까봐 무섭다.


[부산일보 2005/08/24 0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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