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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 용 / 보 /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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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국 2006-02-02 18:14:34 | 조회 : 6578
제      목  그만 보여 줘
그만 보여 줘


내 인생의 상처 하나. '유관순'하면 '고갱이'가 떠오른다. 어릴 적 국어 교과서에 유관순에 관한 시가 실려 있었는데,방금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박두진 시인의 '3월 1일의 하늘'이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시는 자취 없고 오로지 시에 나온 한 단어 '고갱이'만 찍혀 있다. 그 단어가 시험에 잘 나왔던 까닭이다. 고갱이:사물의 알짜가 되는 속내. (비) 핵심.

몇 년 전 천안 유관순 열사가 살았다는 초가집에 가보았는데,집도 방도 굉장히 작았다. 방문객이 별로 없어 나는 툇마루에 잠시 누웠다. 그 옆 교회도 열사와 인연이 있어 지하에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유관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으며,설명문도 천천히 읽었다.

유관순 열사는 본인만이 아니라 집안이 거의 순국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 슬프고도 깊은 눈빛은 유관순 개인을 넘어 그 집안의,그리고 짓밟히되 꺾이지 않았던 식민지 백성들의 것이었다. 가슴이 아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다른 학생들이야 어쨌는지 몰라도 나는 유관순에 대해서 배웠기 때문에,도리어 유관순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시험을 목표로 달달 외워 시험은 통과했으나 나는 국어도 시도,시인도,무엇보다 유관순을 잃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 만들어진 '독립 공원'에서 나는 심란했다. 이름부터 그렇거니와 공원은 일제가 우리 독립투사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얼마나 악독한 고문과 살인마저 저질렀는지,고발하고 상기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같은 장소에서 자행됐던 '인혁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고문과 살인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일언반구 없었다. 사실을 반만 드러낸 건 반쪽의 설명이 아니다. 나머지 반을 가린 거짓말이다. 게다가 대단한 아이디어가 거기 번뜩였으니,마네킹들이었다. 고문하는 일제 순사와 고문 받는 독립투사들,이를테면 윗도리가 반쯤 벗겨진 여학생들이 마네킹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독한 년,어서 불어!" 따위 대사들이 성우 목소리로 녹음되어 흘러나왔다. 그리고 관람자들이 단추를 누르면 마네킹들이 스르르 움직여,순사가 투사의 손톱 밑을 쇠꼬챙이로 쑤시고 투사가 고개를 젖히며 비명 지르는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효과음향. "으아악!"

어느 시립 역사박물관에는 손가락을 갖다대기도 전에 전시 상자들이 알아서 인기척을 감지하여,영상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평일인 탓인지 관람자가 나와 내 친구밖에 없었는데,우리가 빠른 속도로 걸어가자 양쪽에서 다급하게 온갖 화면,속삭임,악기 소리,폭포 소리 등등 쏟아져 자못 SF 영화를 방불하였다. 최근 건립된 또 다른 도시의 시립 홍보관에서는 커다란 스크린에 관람자가 손동작으로 원하는 영상을 끌어내어,자유자재로 확대,축소,이동할 수 있다. 설계자 자신이 몸소 시범을 보였는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유야 잘 모르겠다. 지방자치제 때문인지,위기라지만 그래도 경제는 발전하고 있는 건지,전국 각지가 돈 자랑이다. 웬만큼 이름난 유적지와 명소는 질세라 새 단장 중인데,각기 지역적 특색을 살린다지만 방식이 똑같다. 규모,첨단,고급,재미에 대한 강박. 그래서 해놓고 나면 똑같다. 그 안에 사형장도 있는 서대문 형무소든,정약용 같은 대학자의 생가든 떠들썩한 쇼 장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돈 퍼부어 모독하고 망쳐 버린다. 혼자 생각하고 느낄 여지를 비싼 방법으로 말살시켜 버린다.

요즘은 시험지로 시험치는 걸로도 모자라서 특별 활동이다,체험 학습이다,아이들이 작은 수첩을 들고 그런 데를 헤맨다. 내 생각에 그 아이들은 나보다 상처가 깊을 것 같다. '역사'하면 '깜박이는 커서'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건,다른 것을 보고 듣지 못하게 하는 강요이기도 하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기억을 뇌리에 박고 봉인시켜 버린다. 나는 어디 가나 눈과 귀에 뭔가를 쑤셔 넣는 이 사회가 아슬아슬하고 공격적이라고 느낀다. 그냥 놔둬라. 침묵과 텅 빈 고적을 돌려 달라. 제발 그만 보고 듣고 싶다.

[부산일보 2006년 1월 25일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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