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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전 2006-06-06 14:31:09 | 조회 : 5350
제      목  한국사 인물열전, 그 열한 번째: 박은식과 몽배금태조
1974년에 나온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이 있어 일세를 풍미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반도의 반쪽이라는 섬아닌 섬에 사는 제한이 있고, 서민들은 해외여행을 꿈도 못꾸는 시절이었다. 당연히 세계에 대한 인식은 '정보 의 편재'에 갇힌  시절이어서 '공산주의자들은 머리에 뿔이 난 것처럼' 알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베트남 전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 이영희 선생님이었고 그 책이 바로 1974년에 나온 창작과 비평사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그
책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이 땅에 진주한 미군과 미국편에 서야 했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강요되어진  세계인식의 틀을 바꾸는 전기가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명-청-일본-미국으로 이어지는 사대 종주국 중에서 미국에 대한 속살 엿보기 정도였다. 그러나 둑에 난 조그만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리는 법이라, 미국 일변도의 인식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까지 항상 '혈맹' 미국을 외쳤지만 지금 기억에도 생생하게 미국은 당시에도 대한민국의 방위는 '미국의 국익'에 중요하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였다. 처음에는 국익 즉 국가의 이익이라는 말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지만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리나 혈맹이라는 말보다도 미국쪽의 입장으로서는 국익이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국가간에는 영원한 명분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이익이 있고 거래관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는 '혈맹'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박은식 선생님의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를 접한 다음에 이미 1910년대에 이러한 선각자가 있어 사대주의의 허위의식을 청산하려 한 것을 알고 시대를 앞서나간 것에 대해 새삼 존경의 심경이 두터워 졌다.  지금에 와서 읽어도 박은식 선생님의 몽배금태조는 감동적이다. 더더구나 박은식 선생님이 이미 나이가 환갑이 넘은 때에, 그 때까지 가졌던 사대주의의 허위의식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인식 전환을 하면서 자기 고백을 한 글의 문장 문장마다 넘쳐나는 안타까움에는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60여년 앞서간 박은식 선생님의 몽배금태조를 일독 하기를 권합니다.

한국사 인물열전, 그 열한 번째

박은식과 몽배금태조



박은식은 원래 전통 유학을 공부하였다가 조선말기에 대동사상과 양명학에 입각하여 유림과 유교문화를 개혁하여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게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905-1910년간의 애국계몽운동기의 가장 영향력이 큰 지도자였다. 박은식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황성신문의 주필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하였으며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마침내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후인 1911년 4월 망명을 하였다. 만주의 환인현에 단애 윤세복(대종교 3대종사)의 집에 1년간 머물며 동명성왕실기, 발해 태조 건국지, 몽배금태조,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대동고대사론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대종교인이었던 단애 윤세복의 영향을 받아 그 전에 가졌던 유교와 사대주의, 모화주의, 소중화주의를 완전히 탈피하고 국혼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단군조선에서 고구려 발해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 고유의 사상사의 흐름에 바로 서게 된 것이다.  조선왕조 500여년의 케케묵은 사대주의를 벗어버리고 비로소 민족적인 시각으로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허위의식인 사대주의, 모화주의, 소중화주의를 반성하면서, 아직까지 그릇된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동포들을 깨우는 통렬한 자기고백을 ‘몽배금태조’에서 ‘금태조’의 입을 빌려 ‘무치생(조국의 망하였으므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낮추어서 부름)‘인 자신을 책망하는 통렬한 회개의 뜻을 설파하였다. 이 글은 지금에 읽어보아도 그 장한 뜻과 높은 기상을 느낄 수 있는 명저이다. 몽배금태조의 일부 글을 인용해 본다.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너는 짐을 위하여 평일에 읽은 것의 대강을 들어 한 번 외워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에 무치생은 감히 사양하기 어려워 어릴 때 처음 배운 사략과 통감의 첫편을 가려 외우니 황제가 물어 보셨다.
“그것이 조선의 고대사인가?”
무치생이 대답하여,
“아닙니다. 중국의 고대사입니다”
하니 황제가 다시 물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처음 배우는 교과가 모두 이런 책인가?”
무치생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조선의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의 조선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처음 배우는 교과가 이러한 즉 어릴 때에 벌써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 사상이 모두 노예의 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영웅자가 누구이며 소위 유현자가 누구이며 소위 충신자가 누구이며 소위 공신자가 누구이며 소위 명류자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뿐이다. 이러한 비열한 근성을 뿌리 뽑아 버리지 아니 하고는 조선 민족의 자강 자립의 정신이 배태될 까닭이 없기 때문에 빨리 이런 종류의 방법을 개량하여 조선역사로 하여금 백성의 머리 속에 살아있으면 그 민족이 어떠한 곳에 표류하더라도 조선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래 희망의 결과도 이렇게 해야만 생겨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현상은 고사하고 장래의 희망도 필시 없을 것이니 너는 십분 주의하여 실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

하시고 또 다른 책을 외우라고 하심에 무치생은 소학을 송독하여
“새벽에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운운”
하고, 대학을 송독하여
“물을 격한 후에 지에 이르고(격물치지)”
하니 황제가 말씀하시기를
“네가 소학을 읽을진대 닭이 울면 일찍 일어나 낯을 씻고 양치질을 한 적이 있었는가? 또 대학을 읽을진대 능히 천하의 물리를 깨달아 마음에 지식을 쌓은 적이 있었는가? 네가 과연 격물치지의 실공이 있을진대 천문 지리 각종 동식물의 이를 설명하겠는가?"
하니 무치생이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황제가
“온 나라의 유생이 모두 그러한가?”
라고 물으시자 무치생은
“그러합니다”
했다.
그러자 황제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소위 유생이란 자는 말만 높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여 세상을 속여 이름을 도적질하는 무리로구나. 말로는 충이요 효라 하지만 모두 공허할 뿐이고 또 인이요 의라 하지만 과장될 뿐으로 쓸데없는 말과 겉치레로써 어찌 백성을 구제하고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오직 실상을 버리고 허위를 숭상하는 까닭에 그 표면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비루한 것이고, 또 그 입은 맑고 시원하나 그 마음바탕은 더럽고 탁하여 진실한 것이 없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진실로 몸 바쳤던 선조의 후예 또는 집안으로 자처하여 눈으로만 성리학을 배우고 학문 재상으로 칭하는 자들이 실상은 모두 나라를 팔아먹는데 공신이 되며, 또한 일반 대중 앞에서 애국주의를 부르짖으며 공익의 의무를 설명하던 자들이 모두 나라를 팔아먹는데 선구가 되었다.

이는 짐이 지난날 송나라의 정황을 겪어본 바 있었는데, 어찌 조선이 송나라의 병폐를 이어 받아 그러한 해독에 전염되어 이에 이르렀는가? 대저 송나라의 예의와 문물은 중국의 3대 이후에 제일이었고, 성리 철학은 공맹(공자와 맹자)의 적통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었는가? 이 때를 당하여 중국 천지에는 도덕원리를 강론하는 자가 수천인에 이르렀고, 충효절의를 숭모하는 자의 존화양이주의를 제창 하는 자, 그리고 우국망신의 의기를 스스로 외치는 자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온 백성의 하나하나가 충신 의사요, 나라의 기초가 태산 반석 같아 보였지마는, 급기야 대금(大金)의 군사가 중원에 들이 닥치고 변성이 함락되는 날에 휘종과 흠종의 두 황제가 나의 포로가 되면서 송나라의 모든 땅이 나의 판도에 들어 왔을 때, 송나라의 황제를 위해 절의로 죽는 자는 이약수 한 사람 뿐이었다.

저 진증, 왕륜과 같은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권력에 빌붙어 신하가 됨으로써 벼슬을 얻기를 자청하는 자가 수천이었다. 그들의 지난날의 소위 충신은 오늘에 반신이 되고, 지난날의 소위 의사가 역적이 되듯이 순간순간을 헤아리기 어렵고 되풀이 바뀌어 늘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로지 그 국가는 허식의 문장으로만 채워진 채 태평을 가장하고 소위 사(士: 선비)라는 무리들이 말만 앞세움으로써 명예를 도적질하여 진실이 소멸되고 허위의 악풍만이 자라난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가소로운 것은 저 중국인들이 중화의 신성한 지위로 스스로를 존귀하고 크게 하여 외국에 대하기를 이적과 만맥이라 칭하며 천시하기가 심하고 모욕하기가 이를 데 없이 지나쳤지만은, 급기야 저들의 힘이 굴복당하고 그 세력이 다하게 된 경우를 당하여는 오히려 아첨하는 모습과 비굴한 모양이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롭게 하는 것이었다.

짐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켜 요를 멸함에 저 송나라에서는 즉시 나에게 사신을 보내어 덕을 칭송하면서 ‘해가 뜨는 곳에서 실로 성인께서 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저들이 그전까지는 우리나라를 이적(夷狄)이라 욕하며 우리를 짐승처럼 취급하다가 짐의 국세가 발흥하고 군사의 힘이 커지는 것을 보고는 성인이라는 칭호를 짐에게 바치니 그 가식됨이나, 기만된 아부의 정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저 남송과 같은 경우에는, 짐이 남의 나라 종사를 끊어 없애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인 것 같아 강의 왼쪽 한 모퉁이를 주어 그 임금으로 책봉하여 송제(송나라 황제)로 삼았더니 그가 신(臣)을 칭하고 질(質)을 칭하여 관대한 처분을 바라기에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지내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나라의 문자에는 짐의 나라를 이르기를 금나라 놈들이라 표현하면서 우리를 오랑캐라 욕설을 퍼 붓고 있다.

이미 우리의 신하와 질이 된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이 곧 오랑캐의 신하 또는 질이 됐다는 것을 스스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는 문자의 거짓된 기만이고, 실제로 사실을 반성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저들 송나라 사람들은 비록 화(華)를 숭배하는 유습의 폐단으로 국가와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 점이 있어도, 그 학문과 문장은 실로 높이 세웠던 특색은 있었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다만 일을 맹종할 뿐 스스로의 학문과 문장도 갖추지 못하고 한갓 화를 숭상하는 유습의 폐단으로 더욱 허위만을 키움으로써 국가와 백성을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하고도 아직도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오로지 중국에 대한 쓸데없는 숭배와 유생의 그릇된 습속만을 고수하려고 하는가? 또 조선의 유생이 주창하는 존화양이(尊華攘夷)는 무엇을 말함인가?

세계 만국의 모든 사람이 모두 자기나라를 존중함으로써 의리를 삼는 까닭에  중국인은 존화양이를 주장하거니와, 오늘날 조선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 즉 중국을 존중하는 것으로 일대 의리로 생각하니 이는 자국의 정신을 소멸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조에 대한 은덕을 말할 지라도 조선 사람들은 마땅히 그 때에 전국 각처를 유린했던, 그리고 왕릉들의 도굴을 자행했던 왜구에 대해 먼저 보복하고 다음에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의거가 있는 것이 정당하거늘 명나라를 위해 원수에 보복한다면서 자기들에 대한 불공대천의  원수는 전혀 잊고 말았으니 그 의가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인가? 또한 대개 50년 전부터 일인이 조선을 침범하였거늘 이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존화를 논하였으니 그 어리석음이란 얼마나 심한 것이었나? ...."

이러한 박은식의 사상의 전환에는 당시에 중흥하였던 대종교의 영향이 컸다. 대종교는 두일백으로부터 나철에게 전해진 다음, 나철에 의하여 중흥된 한민족 고유의 종교로 단군조선-고구려-발해를 이어 오면서 고유의 사상체계, 종교의식, 역사의식을 함유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만주에서 벌어졌던 무장독립운동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으며, 암울한 시기임에도 결국은 광복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신념을 굳게 만들어준 무형의 유산이었다.

대종교와 만난 이후 박은식은 ‘몽배금태조’를 통하여 지금까지의 모화사대주의의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전통으로 회귀하면서 아직까지 미망에 사로잡힌 사대주의에 물들은 사람들에게 각성을 외치는 통렬한 외침을 가슴으로부터 우러나는 안타까움으로 뿜어 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아직 한국의 현대를 사는 사람에게도 박은식의 ‘몽배금태조’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전세계에서 인구 500만이 넘는 나라 중에서 자기 나라 군대의 작전지휘권을 다른 나라에게 위임한 나라가 없음에도 아직 작전지휘권 회수의 목청을 높이지 않는 사대주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1911년에 쓰여진 박은식의 ‘몽배금태조’는 여전히 현재형의 외침인 것이다.

박은식은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이승만은 소위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추구한다하여 미국에 의한 한국의 위임통치청원을 하였고, 이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들 간에 소동이 있었으며, 또한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상해에 있어야 함에도 상해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싫어하여 미국으로 도피하였으므로 결국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그 책임을 물어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에 조선 광복에 걸림돌을 예시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이승만의 외교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창호의 준비론이었다)으로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의 통일을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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