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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09-06-01 16:28:21 | 조회 : 3575
제      목  한국사 인물열전, 그 일곱 번째 인물: 소현세자
지난번의 이순신 제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쉬웠던 점은 조선시대 패러다임에 충실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나가는 다른 말로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인물들에 의해 발전한다. 복잡성이론(Complexity theory)에서도 너무 많은 변화와 너무 적은 변화의 중간에(즉 중용의 상태) 문화와 종족의 번영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조선(고조선이 아닌 근세조선)은 대원군시대에 쇄국한 것이 아니라 처음의 이성계의 개국시절부터 쇄국한 것이다. 극적으로 하멜의 표류기로 드러나는 모습이 조선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모든 외교 교섭은 오직 명나라(다음은 마지 못해서 청나라)와의 사대 조공외교가 있을 뿐이며, 귀찮게 구는 야인(여진/만주족)과 왜(일본)을 달래주는 교린외교가 있을 뿐이고 그 외 나라의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으며 설사 그런 사람들이 조선에 표류하여 왔더라도 중국으로 송환하거나 아니면 일본으로(일본이 천주교도를 처벌하던 때에는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꺼려하였다) 보내는 것으로 하여, 조선의 독립적인 외교는 아예 스스로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도 조선시대의 비석을 보면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 쓰여진 것이 많다. 지금식으로 하면 유미한국(有美韓國) 쯤된다. 그리고 중국과의 조공 무역과 일본에 대한 삼포/왜관 무역 이외에는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바다 멀리 고기잡이 하는 것도 금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쇄국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정여립의 자유로운 사상과 백호 임제의 자유분방함 그리고 소현세자의 청나라와 유럽과학을 향한 열린 마음이 허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질곡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짐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어 재생산되는 것이다.

한국사 인물열전, 그 일곱번째
소현세자



소현세자의 비극은 조선시대의 모순을 함축하는 운명적인 비극이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실패야 말로 바로 조선시대의 질곡이며 조선이 건국 때부터 가졌던 한계이기도 하다. 또한 인조반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반동의 극치이기도 하며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스스로 포기한 사건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자이며 효종의 형이고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청이 침입하여 조선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항복한 전쟁) 때에 인조와 함께 서울의 송파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청나라의 심양에 머물러 있다가 청나라와 직접 상대하는 것을 꺼려하는 인조를 대신하여 청나라와 조선간의 많은 외교 경제 현안을 처리하였으며 1640년부터 1642년까지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1644년 청나라의 원정군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가 1645년 영구귀국 하였다. 북경에서 직접 명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북경에 와 있던 서구의 선교사(아담 샬 등)들을 접촉하여 서구의 과학기술과 역법 및 천주교에 대해 견해를 넓히고 청나라에 대해 이해하고 유화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때에 인조는 눈물을 흘리며 송별하였으나, 소현세자가 귀국하여 청나라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대해 인조는 노골적으로 냉대하였으며, 급기야는 귀국한지 두달만에 소현세자가  급사를 하는데 아마도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것으로 본다.

소현세자와 관련하여 소현세자빈을 주목하여 보면 아주 특이한 면이 많이 있다. 소현세자빈은 조선의 왕실 여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 땅을 벗어난 생활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것은 병자호란의 결과로 청이 세자와 세자빈을 다 인질로 요구하여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러한 참담한 상황에서 청나라의 심양(현재의 중국 요령성 심양시)으로 가서 심양궁 근처의 심양관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에 심양에 머물던 조선인 일행은 192명이었는데,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면포, 수달가죽, 꿀, 표범가죽 등으로 청나라와 중개무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청나라가 제공한 농토를 이용하여 조선의 영농법으로 농사를 시작하여 곡식을 수확하고, 이를 이용하여 청나라에 노예로 잡혀와 있던 조선인을 속환(돈으로 노예의 신분을 풀어줌)하여 심양관은 아주 풍성한 조선인의 무역거점이면서 거류지로 변모하게 하였다.

이처럼 세자빈 강씨는 무역과 영농을 주도하여 심양을 떠날 때는 심양관에 4700석의 곡식이 남아 있었다 한다. 만주족은 수렵민족이어서 영농이나 무역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며, 항상 물자부족에 시달리는 형편이어서 더더욱 강빈의 수완이 돋보인 것이다. 소현세자 부부가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이방송 같은 중국인 천주교 신자인 환관과 궁녀를 대동하였으며, 북경에서 접한 서양의 각종 과학기구와 서적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귀국한 후 청나라에서 접한 서구문물과 새로운 기풍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한 국가의 경영 기반을 갖추려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을 의심하였고 급기야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를 독살하였으며, 소현세자의 뒤를 소현세자의 아들로 잇게 하지 않고 동생인 봉림대군(나중에 효종이 됨)으로 잇게 하였으며, 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였으며 다시 사약을 내려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주로 귀양 보내어 죽였고, 소현세자빈의 친정어머니와 오빠들까지 죽였다.  이로써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광해군 폐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역시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잘못 된 첫 단추(사대주의)가 계속 이어지는 조선 왕조 자체의 비극적 결말인 것이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은 인조가 죽은 후 즉위하니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재위기간에(1649~1659년) 청나라를 북벌한다는 북벌 준비를 하였는데 아마도 소현세자의 죽음의 영향으로 왕으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책이었을 것이다(당시의 명나라를 숭배하는 썩은 유림들의 정신 상태로 보면, 광해군과 소현세자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그러한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선생님 글

재미 있는데
늘 편집이 빡빡해서 화면으로 보기가 어려워용.

행갈이 넉넉하게 부탁드려요.
04.22. 08:54 06.01. 04:31 - 삭제
관리자
광고댓글이 너무 많아서 부득이하게도 새로 올렸습니다.. 06.01. 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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