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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수전 2012-08-03 21:35:24 | 조회 : 1894
제      목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부제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어느 나라 교육이든지 그 나라가 교육을 통해서 양성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은 대개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교육이 신사(젠틀맨)을 양성하는 것이라든가 일본의 교육이  사무라이의 덕목을 갖춘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라든가 유럽과 미국의 교육이 양식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든가 하는 명시적이든지 묵시적이든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모델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민국 건국(1919년 임시정부부터) 이래 ‘홍익 인간’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실제적인 모델로 ‘홍익 인간’을 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까지 모호한 채로 지내왔다. 실제는 ‘선비’형 인간을 장려하여온 다양한 증거들이 있다. 선비는 실제로는 조선 시대 선비를 모델로 말하는데 조선 선비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해 메스를 들이대고 살펴본 명저가 바로 이 책이다.
먼저 저자는 선비에 대한 정의로 사전에 나오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의미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를 칭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정의한 다음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정말  조선의 선비는 중국의 사대부와는 달리 학자이면서 동시에 권력층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선비의 유학은 정치와 불가분의 것이었으며 당쟁이 격화할수록 생사를 결정하는 명분과 빌미가 되었다. 문제는 조선 선비들이 말한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유교적 의리‘란  최종 대상이 조선의 군주인 임금이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것이고 이는 조선 건국의 업보인 ’사대주의‘에 있다는 점은 희극적인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광해군 시절 비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라는 황당한 말을 당연하게 뱉을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조선이 무너지는 구한말에 이르러서도 중화질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의병을 일으킬지언정 일본과 한판 붙어 조국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위정척사‘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유림은 일제시대에 접어들자 바로 일제에 유착하여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뀐 동아시아 패권질서 아래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였다. 1919년 일어난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의 대표 33인중에 유림을 대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음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노론이 주축이 된 유림 세력들은 한일 강제병합후 일본으로부터 3000만엔(현재 시세 약 4조5천억원 해당)에 달하는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받았고(이는 조선의 정치 주체세력인 그들이 일본에 조선을 팔아 넘긴 것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자선사업을 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내 일제강점기 내내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일제에 부역하였다.  
또 선비들이 청빈과 안빈낙도를 이상으로 생각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 농토의 대지주가 바로 사대부이었으며 농토의 노동력으로 노비/소작농을 혹사하였다. 대표적인 사대부인 퇴계 이황의 경우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고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였던 점으로 본다면 이황의 소유 농지는 논과 밭이 각각 17만평 이상으로 약 34만평의 농지를 보유한 셈이다. 이러한 선비/사대부들이 청빈과 안빈낙도를 주장하는 것도 해괴한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상업을 천시하고 무역을 금하였으며 도로를 뚫지 않고 수레를 이용하지 않는 등 나라가 부자가 되는 정책을 원천적으로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소박하게 꿈꾸었던 자급자족의 농촌사회 이상에 영향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옭아매는 질곡이 되었다. 청빈과 안빈낙도가 개인적인 수양 덕목으로 좋을지는 모르지만 국가 집단의 이상이 되면 국가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법이다.
지금 인권에 대한 잣대로 본다면 노예제도인 노비는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는데 조선 당시 사대부들은 노비제도를 예의와 염치를 배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옹호하였다. 조선 사대부들은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이면 아이들이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종부 종모법을 ‘경국대전’에 명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국가 세수가 감소하는 현실을 초래하였다. 중종과 선조 대에 종모법이 부계를 강조한 유교적 인륜에 어긋나니 종부법을 따라야 한다는 유희춘 같은 이들의 주장도 있었으나 노비수의 감소를 우려한 사대부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의 원조인 공자와 맹자는 노비가 없었는데 어떻게 예의와 염치를 실천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토록 사모하였던 당대 명나라의 사대부들은 노비를 거느리지 않고도 어떻게 예의와 염치를 기르고 있었는지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노비 문제에 대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중 잣대를 적용하였었다.  결국은 유교적 폐단에 비판적이었던 친일 성향의 개화파 인물들이 갑오개혁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노비제도는 폐지되었던 것이었다. 그전까지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비제도를 옹호 지지하였으며 노비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어떤 실질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음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심지어 실학자인 정약용 조차도 1801년의 공노비 해방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18세기 중반까지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이상이 노비였으며 서울 사대문 안의 경우 약 50%에 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국방문제에 대해  심지어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에도 조선 초기처럼 양반의 군역을 부활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국방력 강화를 위한 병농분리정책(즉 농민 징집훈련이 아닌 상비군 육성 정책)에 대해서도 양반세력들은 반대하였다. 국방력의 문제를 알고서도 특권(군역 면제)과 재산(노비)을 잃지 않으려고 군제 개혁 논의를 외면하였다. 아마도 사족 중심의 문치 구조를 위협할 수도 있는 직업군인 계층의 출현을 꺼렸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외적의 침입이 있다면 중국의 국방력 우산 아래 들어가면 된다는 안이한 인식이었고 결국 동학 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하였고 청군 파병은 일본군 침입과 청일 전쟁을 유발하게 되었으며 이후 수동적으로 영일동맹, 가쓰라 태프트 밀약, 러일전쟁 등 국제적으로 조선의 식민지 전락이 결정되자 사대부들은 그대로 일제에 순응하였다. 언제 한번이라도 근왕병을 일으키자는 논의도 없었으며 국왕 자체도(고종/순종) 국민들에게 대해 일제의 국권 강탈에 대해 조국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근왕병 모집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베트남은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에 맞서 약 20년간 전쟁을 하였으며 항불 근왕병 모집을 하였었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학의 이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가 주체가 되지 못하고 사대모화질서를 숭앙하여, ‘중화’를 받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스스로를 천시하는 비주체적인 유교절대주의에 교조적으로 빠짐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부국 강병이 아닌 빈국약병 정책을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추구하였으며 스스로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중화를 받듦으로써 ‘중화’가 일본제국주의로 바뀌고 그 일본제국이 미국으로 바뀌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상한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본다면 일부의 사람들이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회수를 반대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얘기한다면 대한민국의 교육목표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이다. 홍익인간의 모델은 고조선 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내려오는 선인(仙人), 조의 선인, 재가화상 등 스스로 도를 닦고 깨달아 민중을 위한다는 개념이지만 좀 더 명확한 개념 정립과 논의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조선의 선비는 대한민국 교육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논지이다. 이 책은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한 계승범이 2011년 11월 30일에 역사의 아침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2011년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 당선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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