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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2007-04-23 17:35:36 | 조회 : 4602
제      목  예술가 눈은 자신에게 차갑다[세계일보2007.03.15]
[문화산책]예술가 눈은 자신에게 차갑다

손가락을 허벅지에 대고 끊임없이 글씨 연습을 하던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바지는 허벅지 부분이 늘 해져 있기 마련이었다. 아이는 길을 걸으면서도, 길가에 앉아 쉬면서도 글씨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연못가에서 묵을 갈고 붓을 빨며 글씨 연습을 하느라 못물을 모두 검은색으로 물들게 했다는 묵지(墨池)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이 아이가 훗날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중국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왕희지이다. 왕희지에게는 후계자로 일컬어지는 왕헌지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 두 왕씨의 작품은 왕서(王書)라 불리며 최고의 명성을 누렸고 숱한 제왕들의 수집품목 중 늘 첫째자리에 있었다.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인 당나라 태종은 왕희지 부자의 글씨를 사랑해 온 천하에 있는 왕서를 비싼 값에 사들였고,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했다. 사후에 더욱 유명해졌지만 생전에도 그들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서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왕헌지에게도 왕희지 못지않은 각고의 시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젊은 시절의 왕헌지는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의 글씨만 알아주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내놓아도, 아버지의 글씨와 똑같이 써서 내놓아도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자기 작품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 왕희지도 아직 멀었다며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왕헌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 눈에는 자기 작품이 아버지의 작품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입견 탓이라고 생각한 왕헌지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엿보았다.

아버지 왕희지는 언제나 글씨를 써서 서랍장에 넣어두고 출타하곤 했다. 그리고 보름쯤 후에 돌아와 서랍장을 열어보곤, 어떤 작품은 찢어서 버리고 어떤 작품은 벗들에게 선물했다. 보름의 시차를 두고 자기 작품을 평가한 후 발표할 작품과 버릴 작품을 선별했다는 것이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왕희지조차도 자기 작품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평가하기 위해선 보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왕헌지는 이 틈을 노리기로 했다. 붓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글씨를 서랍장에 넣어두고 집을 나서자, 왕헌지는 서랍장을 열어 작품을 모두 꺼내갔다. 그리고는 두문불출하고 아버지의 글씨를 흉내내어 쓰기 시작했다. 보름이 지났다. 출타에서 돌아온 왕희지는 서랍장에서 작품들을 꺼내 펼쳐들었다. 한동안 작품들을 바라보던 왕희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아들 헌지가 나서서 까닭을 물었다.

“이 글씨를 보아라. 모양은 그럴듯하나 기운도 없고 품격도 없구나. 내가 늙었나 보다. 이제 붓을 놓을 때가 되었어.”

이에 아들 헌지가 자기도 마침 똑같은 시제로 쓴 작품들이 있다며 보아주십사 하고 내놓았다. 그 작품들을 바라보던 왕희지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참 좋구나, 좋아. 전아하고 힘차고 기품이 있다. 헌지야, 네가 비로소 한 경지를 얻었구나. 내가 안심하고 붓을 놓을 수 있겠어.”

헌지는 무릎을 꿇고 저간의 사정을 말하며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의 글씨와 자기 글씨를 바꿔 놓고 평가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깨달은 바가 있는 왕헌지는 이후 치열한 노력 끝에 아버지의 후계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어쩌면 왕헌지는 그 사건에서 아버지 왕희지가 왜 붓을 놓으면 보름 동안 집을 비우고 출타하는지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보름 동안 작품을 잊고 산천경개를 바라보며 객관적 눈을 얻고 돌아와 문득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 작품을 바라보는 엄정함을 배웠을 것이다.

요즘 공모전을 치르고 공모전에 응모한 작가 지망생들의 작품을 대하며 드는 생각이다. 자기 작품에 대해 스스로 나서서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는 예술가들을 대하며, 내 작품이 왜 누구 작품만 못하느냐고 따지는 이들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이다. 자기 객관화의 눈을 갖고 스스로 작품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가장 소중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강태형 시인·문학동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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